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회선 사건 (문단 편집) === 1923년 시점의 국회의 상황 ===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끝나고 구국회가 회복된 시점에서 차오쿤이 총통 자리를 쟁취하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었다. 당시 국회는 차오쿤을 추대하려는 차오쿤 옹호파와 차오쿤의 대총통 추대를 반대하는 차오쿤 반대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의원 의장 우징롄, [[저보성]] 등이 이끄는 구국민당계의 익우사[* 150여석 규모.], 구 공화당원으로 구성된 중의원 부의장 장백렬 등이 이끄는 신공화당, 구 국민당원들로 이루어진 민치사[* 100여석 규모.], 과거 [[홍헌제제]]를 이끌었던 제제파와 [[교통계]]의 잔여세력이 합작한 헌정 토론회[* 40~50석 규모.], 구진보당원들로 구성된 [[진보당(중국)|헌법 연구회]] 등이 대표적인 차오쿤 옹호파로 이 6개 주요 단체를 제외하고도 총 20여개의 단체가 차오쿤을 옹호했다. 이들이 차오쿤을 옹호한 이유는 당연히 정치적 이익이나 재물을 얻기 위함이었지만 [[후스]]의 경우, 군벌이 군사통치를 하려하지 않고 국회를 통해서 대총통 자리를 얻으려는 것 자체를 정치적 진보로 평가하기도 했다. 반대 진영에는 정학회, [[안복계]], 삼성의원구락부 등이 있었다. 정학회는 곡종수, 이근원 등이 이끄는 구국민당계 정당[* 40~50석.]으로 리위안훙의 중임을 지지했다. 안복계는 [[돤치루이]]와 [[쉬수정]]이 만들었던 안복구락부의 잔여세력으로 유은격 등이 지도자였는데 안복구락부가 1920년 [[안직전쟁]]의 결과로 해산당했으나 안복계는 당연히 직예군벌의 수령인 차오쿤의 대총통 선출에 반대했다. 삼성의원구락부는 만주의 동북 삼성 출신의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 50여명 규모.]이었는데 [[장쭤린]]의 원조를 받아 차오쿤의 대총통 선출을 반대했다. 차오쿤이 우선적으로 착수했던 작업은 총통 선거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여론이 차오쿤의 대총통 선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원들이 출석을 꺼렸는데 이에 차오쿤은 우징롄으로 하여금 매주 목요일마다 50원의 출석비를 지급하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